- 보시라이 정변 계획 재구성
- ‘창홍타흑’ ‘여론몰이’ ‘인맥확보’‥권력 탈취위해 치밀한 준비
- 2012.05.19 16:05 입력
![]() ▲갑작스러운 해임으로 전세계의 주목을 받은 보시라이(薄熙來) 전 충칭 당서기. |
[시사중국] 보시라이(薄熙來) 전 충칭 당서기 해임 사건은 중국 공산당 내부의 심각한 분열을 드러내며 전세계에 큰 충격을 줬다.
중공 당국이 정통성을 의심 받는 위기를 감수하며 보시라이를 해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가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인 저우융캉(周永康)과 공모해 당권에 도전하려 했기 때문으로 분석되고 있다.
보시라이는 차기 지도자로 내정된 시진핑(習近平)을 끌어내리고 자신이 국가주석 자리에 오르기 위해 오랫동안 계획적으로 준비해 온 것으로 전해졌다.
해외 중문사이트 보쉰(博訊)은 최근 보도에서 그동안 흘러나온 정보들을 종합해 보시라이의 정변 계획을 재구성했다. 보쉰은 보시라이가 정변을 성공시키기 위해 3가지 수단을 동원했다고 밝혔다.
첫 번째 수단은 창홍타흑(唱紅打黑)운동이었다. ‘타흑’은 조폭과의 전쟁을 가리키는데 실질적으로는 정적(政敵) 숙청이었다. 전임인 왕양(汪洋) 광둥성 서기, 허궈창(賀國强) 중앙기율검사위 서기의 측근들이 그 대상이 됐다.
타흑 운동은 또 개인 사업가들의 재산을 수탈하는 과정이었다. 많은 기업가들은 조폭 두목으로 몰리거나 조폭과 결탁했다는 이유로 체포돼 재산을 강제 몰수당했다.
혁명가요 부르기를 비롯한 ‘창홍’운동은 중국 좌파들을 결집시켰다. 이들은 역사에 의해 도태된 마오쩌둥 주의를 지향하면서 중국을 문화대혁명 시대로 되돌려 놓으려 했다. 보시라이는 중국에서 두 번째 마오쩌둥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
두 번째 수단은 언론매체를 통한 홍보였다. 문화대혁명을 통해 여론 선전의 중요성을 잘 터득한 보시라이는 국내외 언론매체와 언론인을 매수하기 위해 거금을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충칭의 창홍운동은 많은 언론들로부터 지속적인 극찬을 받았다. 또한 보시라이의 정치적인 수요에 따라 때 맞춰 여론몰이 기사들이 쏟아졌다. 이 때문에 개방적인 일부 중국 연해지역에서도 한때 혁명가요가 울려 퍼졌다.
세 번째 수단은 고위층 간부들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는 튼튼한 보호막을 형성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보시라이는 중공 8대 원로인 아버지 보이보(薄一波)의 인맥을 확보한데다, 자신의 정치적 경제적 활동을 통해서도 폭넓은 인맥을 형성했다.
정치적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재력도 필수다. 보시라이는 이를 위해 짧은 시간내에 독립적인 경제권을 형성했다. 이 경제권에서는 독점과 부패가 만연했다. 보시라이와 함께 자랐던 고위간부 자제들은 모두 자연스럽게 보시라이의 경제권에 들어가 그의 주변에 뭉쳤다. 충칭에서 열린 중공 원로 자제들을 위한 혁명가요 콘서트가 이를 잘 설명해 준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나고 보시라이는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에 발탁될 그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충칭모델’이란 치국(治國) 이론에 저우융캉을 비롯한 장쩌민파의 지지, 그리고 학계, 법조계, 재계, 군부, 경찰과 태자당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인맥에 거대한 재원까지 장악한 보시라이의 앞날은 탄탄대로처럼 보였다.
보쉰은, 보시라이가 중국 수뇌부에 진입하게 되면 ‘보시라이식의 법률’에 막강한 경찰력, 그리고 국제적인 지지를 통해 정변을 위한 마지막 단계를 실행하려 했다고 소개했다.
http://sscn.kr/news/view.html?section=1&category=3&no=2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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