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해주에서 된장 만듭니다”
- 2012.12.17 01:42 입력
동포 사회 누빈 한 한국인의 삶
연변서 조선족·탈북자 돕다 추방
연해주 고려인 농업정착 사업지원
변산에서 강남터미널을 거쳐 동해까지 가는 길은 멀었다. 중국 조선족과 러시아 고려인들을 지원하는 사업을 하는 특이한 분이 있다는 정보만 듣고 찾아갔다.
한중대학교 안에 있는 ‘바리의꿈’ 사무실. 체구가 듬직하고 순박해 보이는 김현동(51)씨와 같이 일하는 그이의 여동생 김윤령씨가 반긴다. 먼저 ‘바리의꿈’이라는 곳은 무엇을 하는 것일까 궁금했다.
“러시아 연해주 고려인 농업 정착 사업을 지원하는 사회적 기업이죠.” 강원도 원주 태생인데 사투리가 전혀 없고 느릿느릿한 말투다. ‘바리의 꿈’은 2005년 12월에 설립했다. 콩 농사를 지어 장을 만들어 한국에 유통하는 사업이다. 이 콩은 수입콩이라고 거부하기도 하지만 GMO(유전자 조작)콩이 아닌 안전한 콩이다.
연변으로 이주해 동포 교류 도와
김현동씨는 한국에서 노동운동을 하다 통일운동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던 차에 중국 청화대학에 연수하러 가 있던 후배가 한국에 들어왔다. 그 후배가 김현동씨에게 중국을 가서 한번 돌아보자고 제안했다. “그 친구도 돈이 없으니까 다른 친구한테 돈 100만 원을 빌려 와서 ‘형 이거 갖고 들어와’하고 먼저 들어간 거죠. 기다리고 있겠다고. 허허, 그거 가지고 여권 내고 비자 내고 가 본 거죠."
김현동씨는 중국에서 40일을 돌아다녔다. 홍콩, 심수, 내몽골, 북경 주변을 훑어봤다. 500원짜리 숙소에 잘 정도로 거의 배낭여행 수준이었다. 마지막으로 간 곳은 연변이었다. “그곳에 가서 놀랬죠. 이게 뭐야. 남한의 5분의 2쯤 되는 땅에 동포가 80만 명이 있는데 그 역사가 피해의 역사고..”
그는 중국 동포 사회와 북한 사회를 엿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 뒤 민족문제에 관심이 깊어지게 된다. “1년 고민하다가 아내하고 상의했죠. 그리로 가서 살아 보자. 아내가 동의해서 애들 데리고 1996년 1월에 연변으로 이주했어요.”
그 당시 연변에는 한글로 된 책이 많지 않아 한글을 모르는 아이들이 많았다. 김현동씨는 부천에서 책 모으기 운동을 펼쳐 3만 5000권을 모아 몇몇 도서관에 나눠주고 아파트 한쪽을 구해서 도서관을 만들었다.
그해 한국에서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이라는 단체가 설립됐고 김현동씨는 대외협력국장 일을 맡았다. 한국과 중국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경제 교류가 시작됐고 조선족들이 한국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김영삼 정권 때 입국이 막혀 버렸다. 일부 한국인들이 친척 방문으로 초청장을 해 준다는 핑계로 사기를 치기 시작했다. 1만 8000여 명의 조선족 동포 사기 피해자가 발생했다.
“실비용 30만~40만 원이면 되는데 1000만 원까지 치솟았죠. 그 돈 내고 한국에 들어오면 다행인데 못 들어오는 경우가 생겼어요. 조사를 했더니 만 8000건이에요.” 그래서 만든 게 조선족 사기피해자협회란다. 부끄러운 일이었다.
탈북자 돕다 추방당해 러시아로 이주
때마침 1990년 말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이라는 대기근이 발생해 식량을 구하러 북한 사람들이 연변으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김현동씨는 중국 동북 3성 조선족 사기피해자협회, 중국 조선족 상조회에서 활동을 하면서 북한의 식량 난민을 돕는 일을 했다.
조선족들의 단체가 생기는 걸 주시하던 중국은 ‘식량 난민에 대한 장기적이고 대량적인 지원 활동’으로 중국 내의 국경법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김현동씨를 강제 출국시키고 7년 동안 입국 금지 추방 조치를 내린다. 결국 1999년 1월에 가족들은 놔둔 채 김현동씨는 중국을 떠나오게 된다.
김현동씨는 2001년에 설립한 동북아평화연대 사무국장을 하면서 중국 러시아 쪽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때 평생 스승으로 모실만한 이광규 교수를 만난다.
“그분이 ‘김 국장, 연해주에 한번 가 보자’고 했죠. 그해 5월에 연해주 실태 조사를 위한 조사단을 만들어서 이종욱 박사하고 셋이서 갔어요.”
김현동씨는 그곳에 가서 또 한번 충격을 받는다. 1937년도 우즈베키스탄 같은 곳에 강제 이주당한 고려인들 18만 명이 있었다. 황무지를 개척하면서 살아왔던 고려인 동포들은 러시아가 무너지면서 연해주로 이주한다. 이들은 여기에서도 농업을 다시 해보려 했지만 값이 싼 중국 농산물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김현동씨는 2004년 고려인 이주 140주년을 맞아 아내와 두 딸과 함께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 부근 고려인 마을인 우정마을로 이주했다. 2009년에 고려인 기념관을 건립하고 동북아평화연대의 초대 사무국장과 연해주동북아평화기금의 이사를 맡게 되고, 한편으로는 농업 정착 지원 사업을 했다. ‘바리의꿈’ 대표를 맡게 된 것이다.
고려인들은 연해주에서 유통업으로 자리 잡았다. 그래도 농업을 하고 싶은 열망을 접을 수가 없었다. 그곳은 콩의 원산지였다. “그래서 콩을 가지고 모델 사업을 만들어서 해야 되는데 이건 한국과 같이 붙어서 해야 된다고 본 거죠. 된장은 겨울 사업이죠. 여름엔 비닐하우스 농사를 짓고 있고.”
현재 아내는 연해주에 있다. 스물다섯 살 되는 큰딸은 중국 절강대학에서 러시아어를 전공했다. 지금 한국에서 작은 딸은 러시아 연방대학에 입학을 했다. 아이들이 그런 삶을 싫어하지 않는지 물어봤다. 담담하게 대답한다.
“애들이 중학교, 고등학교 때부터 제가 하는 일을 거의 같이 했어요. 둘째는 법학과를 갔는데 엄마 아버지 러시아 법을 모르면 안 된다고 하면서.” 부럽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아들이 생각났다. 이 아이들은 부모의 삶을 그대로 좇는다는 말이다. 김현동씨는 왜 그렇게 힘든 삶을 살까.
“병인 것 같아요. 1981년도 전두환 때 충격 때문에 발목 잡혀서. 그렇게 10년 살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것 같아요.” ‘바리의꿈’이라는 이름에서 ‘바리’는 ‘버린다’는 뜻으로 신화에 나오는 바리데기 공주를 말한다. 이름을 그렇게 지은 까닭이 있단다.
“식민지 때 나라를 잃고 어쩔 수 없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던 동북아시아의 해외 동포를 상징적으로 말하는 거죠. 바리가 결국 아버지를 구한다는 것. 천덕꾸러기로 전락할 뻔했던 재외동포들이 결국은 동북아 평화의 꿈이 될 거다, 그런 뜻입니다. 지금은 한국 사람들한테 가장 중요한 콩을 매개로 교류하는 것이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의 하나라고 보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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