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정치

마거릿 대처 전 英총리와 홍콩의 중국 반환

차이나소식통 2013. 4. 10. 19:24

마거릿 대처 전 英총리와 홍콩의 중국 반환
2013.04.10 11:26 입력
▲1982년,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덩샤오핑(鄧小平)을 만나고 있는 마거릿 대처 영국 전 총리.

[시사중국] ‘철의 여인’ 으로 불리던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가 현지 시각 8일 오전 뇌졸중으로 서거했다.

 

중국인들은 대처 전 영국 총리에 대해 그가 홍콩 반환 담판에서 실패한 후 인민대회당 계단에서 넘어졌다는 일화를 떠올리는데 그친다.

 

이는 중국 관영언론들 ‘덕분’이기도 하다. 신경보(新京報)는 9일 대처의 타계 소식을 전하면서도 ‘덩샤오핑과 회담했던 대처, 인민대회당 앞에서 넘어지다’라는 제목을 달았다.

 

영국은 청나라와 체결한 3개 조약 내용에 따라 1997년까지 홍콩을 지배했고, 1979년-1990년까지 11년 동안 영국 총리로 재임했던 대처는 홍콩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쳤다. 홍콩 주권 양도에 관한 중영 회담이 1982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해 9월 대처는 영국 지도자로서 처음 중국을 방문,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덩샤오핑(鄧小平)과 회담했다. 대처는 과거 조약에 따라 홍콩에 대한 지배를 연장하려 했지만 덩샤오핑은 이를 강력히 거부하며, 불가피하다면 무력으로 홍콩을 수복할 수 있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격론이 오갔던 회담을 마친 후 심기가 불편했던 대처는 인민대회당을 나서다 계단에서 부주의로 넘어졌다. 2년간 22회에 이르는 담판을 거쳐 1984년, 영국은 홍콩의 자치권과 민주주의 정체성을 유지시키는 ‘일국양제(一國兩制)’ 운영 방식에 동의하고 홍콩을 중국에 넘기는 중영연합성명에 서명했다.

 

1997년 홍콩 주권 반환 행사에 참석한 후 대처는 한번도 홍콩을 방문하지 않았지만 늘 홍콩인들의 운명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홍콩 중국 반환 10주년이었던 지난 2007년 인터뷰에서 대처는 홍콩을 중국에 양도하게 돼 매우 슬펐다고 말했다. 경축 분위기에 들떴던 중국 본토인들과 달리, 반환을 앞두고 홍콩인들은 공산당 정권의 지배를 받게 되는데 대해 극도로 불안해했다. 

 

대처가 서거한 후 홍콩 각계는 그가 뛰어난 정치가였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홍콩 주권 반환과 관련해서는 엇갈린 평가를 내놨다. 그가 홍콩의 평화적인 반환에 기여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지만 홍콩인들의 이익을 최대한 지켜주지 못했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다.

 

지난해 중국으로 주권 반환 15주년을 맞은 홍콩에서는 일국양제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는 중국 공산당에 대한 불만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홍콩대학 여론조사에 따르면, “중국 국민이 된 것을 자랑으로 느낀다”라고 대답한 홍콩인은 37%로, 베이징올림픽이 열렸던 2008년에 비해 13%하락했다. 반면에 “자랑스럽지 않다”라는 답변은 10% 증가한 58%를 기록했다.

 

냉전종식에 지대한 역할

 

대처 전 영국 총리는 11년 재임 기간 중 보수당 정권을 이끌며 강력한 지도력과 반공산주의 자세를 보여 ‘철의 여인’으로 평가됐다. 그는 같은 보수주의자인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과 긴밀히 협력해 냉전 종식에 기여한 중심 인물이었다.

 

대처는 소련 공산당 서기장으로 취임 전 고르바초프를 영국에 초대하는 등 신뢰 관계를 구축해 소련 공산당 해체와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를 촉진하는 등 국제정치 무대에서 커다란 역할을 했다. 러시아 전문가들은 대처가 냉전에서 서방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평가했다.

 

대처는 또 자유주의를 내세운 과감한 정책과 개혁을 통해 영국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취임 당시 장기 불황에 빠진 영국 경제를 강인한 지도력으로 회생시켰으며 과감한 민영화와 사회복지 지출 삭감을 통해 1980년대 초 치솟던 인플레도 잡았다.
 
집권 3기인 1990년 유럽통합에 반대하면서 당 지도부의 반발에 부닥쳐 총리직에서 스스로 사퇴했으며 이듬해 5월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http://sscn.kr/news/view.html?section=1&category=3&no=39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