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4대 명작 신해(新解) (1)-삼국지

차이나소식통 2013. 3. 12. 17:51

4대 명작 신해(新解) (1)-삼국지
2013.03.09 15:32 입력

 

[시사중국] 문학은 인류 문명의 중요한 전달매체로 사람들이 매우 좋아하는 예술형식이다. 수천 년의 문명을 거치며 풍부한 역사와 문화적 정수를 간직한 중국 고전소설 중에서 가장 찬란하고 빛나는 작품을 꼽으라면 ‘수호전(水滸傳)’, ‘삼국연의(三國演義.삼국지)’, ‘서유기(西遊記)’, ‘홍루몽(紅樓夢)’ 등 4대 명작을 꼽을 수 있다. 이들 작품은 인류문명을 풍부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인류 발전의 발자취를 기록했고 사람의 사상을 풍부하게 했으며 사람의 도덕과 지조를 육성했다.

 

(1) ‘삼국연의’-천고에 관통된 ‘의(義)’

 

사람은 신(神)이 만든 것으로 중국문화 역시 신이 사람에게 전해준 신전문화(神傳文化)라고 한다. ‘삼국연의’속에는 신전문화의 자취가 도처에 존재한다. 천상의 변화, 세사(世事)의 변천, 기인이사(奇人異事), 신묘한 지혜는 모두 신의 뜻을 함축하고 있다.

 

이 소설을 지은 나관중(羅貫中)은 고금에 통하고 백가(百家)를 두루 섭렵했기에 이에 대해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의 취지는 오히려 여기에 있지 않다. 물론 이 책은 지혜를 중시하며 제갈량, 조조, 주유, 사마의, 육손, 강유 등 주요 등장인물이 모두 신통한 책략을 갖고 있다. 비록 이들 고인(古人)들의 지혜 역시 확실히 주제 중 하나이긴 하지만 이 책에서 표현한 것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럼 무엇인가? 삼국의 역사 이야기인가? 아니다. ‘칠실삼허(七實三虛-열의 일곱은 사실, 셋은 허구)’란 말처럼 소설은 역사가 아니다. 그러나 역사 이야기는 단지 작가가 표현하기 위한 전달매체에 불과하다. 작가가 표현하고자 한 것은 바로 이야기를 보다 풍부하고 다채로우며 생동감 있게 만들어 사람이 갖춰야 할 특징인 의(義)를 전달하려 한 것이다.

 

‘연의(演義)’란 ‘의’를 풀이했다는 말이니, 책이름에서도 이미 이런 뜻을 표시하고 있다. 물론 ‘연의’는 일찍이 일종 소설 형식으로 되어버렸지만 그것의 진실한 원뜻은 바로 책속에 등장하는 각종 인물들의 활동을 통해 ‘의(義)’의 내포를 풍부하게 만드는 것이다. ‘의’가 표현하는 내포와 이야기, 인물은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의’를 제기하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단지 한 글자 표면적인 의미에 불과한 것이 아닌데 그 어떤 정의도 ‘의’의 내포를 정확히 확정할 수 없다. 단지 조금 서술하는 작용만 일으킬 뿐이다. 그러나 ‘삼국연의’를 통해 사람들이 얻는 것은 오히려 영원한 생명력과 참조할 내포를 지니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삼국연의’는 인류 생존의 바탕이 되는 숭고한 품성을 포용하고 있다.

 

좀 더 분명히 말하자면 삼국의 흥망성쇠, 은혜와 원한은 말할 것도 없고, 인물의 희노애락, 충효와 반역은 모두 ‘의’를 둘러싸고 진행된다. 사실 고대에는 수많은 ‘연의’ 소설이 있었지만 ‘삼국연의’에 비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이 책에는 ‘의’에 대해 확실히 아주 세밀한 묘사가 있다. 조조 진영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서서(徐庶)가 단지 말 한 마디로 조운(趙雲)을 구한 것은 유비에 대한 은의(恩義)이다. 조조(曹操)가 울면서 원소(袁紹)를 장례지낸 것 역시 ‘간웅(奸雄)’의 의(義)에 대한 이해와 행동이다. 맹획이 ‘일곱 번 풀려난’ 은혜에 감동해 귀순한 것은 제갈량의 ‘의’에 감화된 것이다.

 

또한 ‘의’의 대명사 관우(關羽)는 ‘의’를 극한까지 풀어냈다. 조조가 3일마다 작은 잔치, 5일마다 큰 잔치를 베풀어주고 적토마를 하사하며 정후(亭侯)에 봉했지만 유비를 그리워 하는 관우의 마음은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조조의 이런 융숭한 은혜에 대해 관우는 그 은혜를 갚지 않고는 떠날 수 없다는 의리지사의 본모습을 드러냈다. 유비를 찾아가기 위해 ‘다섯 관문을 돌파하고 여섯 장수를 목 베며’ ‘단기로 천리를 갔으니’ ‘의’는 여기에 이르러 가히 천지를 놀라게 하고 귀신이 눈물을 흘릴 정도가 된다.

 

나는 어릴 때 ‘삼국연의’를 읽다가 관우가 너그럽게 조조에게 길을 내준 ‘화용도(華容道)’에 이르면 제갈량이 왜 관우를 조운이나 장비로 바꾸지 않았을까 아주 의아해하곤 했다. 만약 관우를 대신해 장비가 화용도를 지켰더라면 조조는 죽은 목숨 아닌가? 하지만 모든 것에는 정해진 운명이 있다. 제갈량이 이렇게 배치한 것은 하늘의 뜻에 따라 인사(人事)를 행한 것이다. 관우가 조조를 풀어준 것은 관우의 ‘의’를 더욱 완전하고 풍부하게 했다. 나관중의 저서는 정말로 ‘의’의 깊은 의미를 잘 체득한 것이다.

 

‘삼국’의 이야기는 이미 천오백년 가량 지난 후 나관중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책으로 완성됐다. ‘의(義)’가 어찌 이렇게 왕성한 생명력이 있었을까? 사실 ‘삼국’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과정 중에서 곧 ‘의’를 인간 세상에 전파한 것이다. 따라서 과거 중국의 ‘의’에 대한 이해와 실천은 다른 어떠한 국가와도 비할 바가 아니었다.(계속)

 

글/ 탄진(撣塵-明慧網)

 

http://sscn.kr/news/view.html?section=2&category=10&no=37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