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극권 창시자 장삼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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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10.12 18:31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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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중국] 원나라 말, 명나라 초에 장삼풍(張三豊)이란 ‘살아 있는 신선’이 있었다. 그는 위로 천문에 통하고 아래로 지리를 알았으며 사람됨이 소탈해 형식에 구애받지 않았다. 말년에는 사방을 떠돌아다니며 기괴한 행동을 일삼아 기인으로 불렸다.
장삼풍은 요동(遼東) 의주(懿州)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의 출생과 어린 시절에 관해 한 가지 신기한 소문이 있다. 그의 모친이 그를 낳던 날 밤 꿈을 꾸었는데 꿈에 어떤 신선이 학 한 마리를 불러 지붕에 머물게 했는데 길게 세 번 울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 깨어났고 곧 장삼풍을 낳았다.
장삼풍은 5살 때 두 눈이 점점 실명되는 기이한 병을 얻었다. 이때 어느 도인(道人)이 그의 생김새가 비범한 것을 보고는 부모에게 말했다. “이 아이는 도인이 될 풍모인데 다만 눈에 마장(魔障)을 만났을 뿐이오. 제게 제자로 주신다면 마장을 벗어나게 하여 시력을 되찾은 후 돌려보내드리겠소.” 부모는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장삼풍은 도인을 따르며 도교 사원에서 살았다. 반년 후 그의 눈은 과연 회복됐다. 사부는 그에게 도가(道家)의 경전을 가르쳤는데 그의 타고난 자질이 높아 한번 보면 다 외울 수 있었다. 7년이 지나자 장삼풍은 부모 곁으로 다시 돌아갔다.
성인이 된 장삼풍은 권세와 공명을 추구하게 됐다. 어느 날 장삼풍이 부모가 세상을 떠나 집에 있었는데 구(丘)씨 성을 가진 한 도인이 그를 방문했다. 두 사람은 현묘한 이치를 담론하다가 긴 대화 끝에 장삼풍의 사상에는 큰 변화가 생겼다. ‘부귀는 똥과 같고 시간은 번개처럼 빠르며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대도(大道)를 구하는 것이로구나!’ 그는 곧 공명과 권세를 팽개치고 사해를 떠돌며 훌륭한 스승을 찾아다녔다.
도를 구한 지 수십 년이 지나 70이 다 된 장삼풍이 종남산(終南山)에 스승을 찾으러 갔다가 우연히 진단(陳摶)의 도를 이어받은 ‘화룡진인(火龍眞人)’을 만났다. 화룡진인은 먼저 그에게 기본적인 공을 가르친 다음 선단(仙丹)의 비결(秘訣)을 주었다. 장삼풍은 도의 묘체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명나라 개국 초기에 장삼풍은 무당산(武當山)에 가서 제자들과 초막을 짓고 수련을 시작했다. 9년 후 장삼풍은 마침내 득도했다. 이때 그는 좀 미친 듯했으며 옷은 다 헤져서 사람들은 그에게 더럽다는 뜻의 ‘납탑(邋遢)도인’이라고 불렀다. 그는 늘 바위 사이로 다녔는데 그곳 백성들에게 늘 “무당산은 장차 반드시 천하 명물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장삼품의 명성은 갈수록 높아졌고 황실에서도 매우 중시하게 되었다. 명 태조(太祖) 주원장은 그를 흠모해 여러 차례에 걸쳐 사자를 보내 그를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 명 성조(成祖) 황제가 즉위한 후 다섯 차례에 걸쳐 장삼풍에게 서신을 보냈는데 매우 간절한 태도로 그에게 산을 내려와 한번 만나줄 것을 청했다. 그러나 장삼풍은 나타나지 않았다.
속인은 명리를 추구하기에 황제의 부름을 받는 것보다 영광스러운 것은 없다. 그러나 장삼풍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전혀 황제를 만날 생각이 없었으며 자신이 살아가는 법이 있었다. 그는 부귀를 구하거나 공명을 원치 않았으며 그저 신선처럼 자유롭게 거닐기를 원할 뿐이었다.
성조 황제는 비록 장삼풍에게 체면을 잃었지만 조금도 허물하는 뜻이 없었고 오히려 “신선의 도는 오로지 성의가 있어야만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의 성의를 표시할 것인가?”라고 말했다.
영락 10년(서기 1412년)부터 성조 황제는 공부(工部)시랑을 파견해 공인(工人) 십만 명을 동원해 무당산에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일으켜 도관을 지었다. 12년 동안 300곳에 모두 33개의 광대한 건축물을 지었는데 8궁(宮), 2관(觀), 36암당(庵堂), 72암묘(庵廟), 12사(祠), 12정(亭), 39교(橋) 등이었다.
호북 균현(均縣) 현성(縣城)에서부터 무당산 최고봉에 이르기까지 면면이 이어지는 장장 70 여 킬로미터에 이르는 건축물들은 총 2만여 칸의 건물에 면적이 160만 평방미터가 넘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런 거대한 건축물들은 진시황과 한무제 이래 없었던 일이다!”라며 찬탄했다. 건물이 준공된 후 황제는 무당산에 태화(太和) 태악산(太嶽山)이란 이름을 내렸다. 또 21명의 6품 관원을 파견해 각 사찰의 업무를 주재하게 했다.
장삼풍이 만년에 무당산이 천하의 명물이 될 것을 예언했는데 과연 그렇게 된 것이다. 명 성조황제 이후 무당산의 모든 도사들이 장삼풍을 무당파의 조사로 떠받들었다.
장삼풍은 내단(內丹) 수련법에 근거해 무당의 내가권법(內家拳法)을 창안했는데 이는 무당파의 최대 특징이 됐다.
이때부터 무당산은 무림(武林)의 성지가 되어 불교의 숭산 소림사와 함께 이름을 나란히 했으며 무술계에 ‘북종소림 남숭무당(北宗少林,南崇武當)’의 설을 남기게 됐다.
출전: 명사(明史)
http://sscn.kr/news/view.html?section=2&category=10&no=2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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