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4대 미녀’ 왕소군 이야기
- 중국 ‘4대 미녀’ 왕소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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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6.11 17:46 입력
![]() ▲왕소군이 흉노땅으로 떠나는 장면을 표현한 그림 |
[시사중국] 왕소군(王昭君)은 춘추전국시대의 서시, 삼국시대의 초선, 당나라 양귀비와 더불어 중국의 4대 미녀 중 한 사람이다.
한(漢)나라 원제(元帝)는 후궁을 모집하기 위해 전국에 방을 붙였다. 이후 전국 각지에서 선발된 수천 명 처녀들이 입궁했는데 그 중 18세의 꽃다운 왕소군이라는 처녀가 끼어 있었다.
황제는 수천 명의 궁녀들을 일일이 볼 수 없자 궁중 화가 모연수(毛延壽)를 시켜 개개인 별로 초상화를 그려 바치게 했다. 그러자 부귀한 집안 궁녀나 장안에 살고 있던 궁녀들은 저마다 화가에게 뇌물을 바치고 자신의 모습을 예쁘게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왕소군은 집안이 가난해 돈도 없을 뿐더러 황제에게 자신의 용모를 사실대로 보여주려고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 그러자 모연수는 왕소군을 괘씸하게 여겨 그녀의 용모를 추하게 그린 다음 얼굴 위에 큰 점 하나를 찍어 놓았다.
그 후 황제는 왕소군의 초상을 보았으나 적당히 그려진 그녀의 모습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결국 왕소군은 입궁한지도 벌써 5년이 흘렀건만 황제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채로 허송세월만 보냈다.
당시 한나라는 국력이 약해 흉노에게 조공을 바치던 시절이었다. 그때 흉노왕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가 화친을 빙자해 황제를 만나려 장안(長安)으로 찾아왔다.
호한야선우는 황제에게 문안을 올린 후 모피와 준마 등 많은 공물을 바쳤다. 황제는 크게 기뻐하고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호한야선우를 대접하자 그는 황제를 장인으로 모시겠다고 청했다. 즉 사위로 삼아달라고 한 것이다.
그 소리를 들은 황제는 기꺼이 청을 받아들였으나 오랑캐인 그에게 공주를 시집보낸다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그리고 그에게 황실의 위엄을 보이려 자기의 후궁 중에서 아직 총애를 받지 못한 미녀들을 불러들여 술을 권하게 했다.
이윽고 궁녀들이 줄지어 들어오자 호한야선우는 각기 다채로운 미녀들의 모습에 한참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그 중에서 절세의 미인을 발견했다. 마음이 바뀐 그는 즉시 황제에게 또 다른 청을 올렸다.
즉 “황제폐하의 사위가 되기를 원하지만 꼭 공주가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저 미녀들 중의 한 명이면 족합니다”라고 말했다.
황제는 그렇지 않아도 공주를 그에게 시집보내려는 것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던 차 생각이 바뀐 호한야선우의 제의를 반기고 즉석에서 수락했다. 호한야선우는 그 자리에서 재주와 미모를 겸비한 가장 아름다운 왕소군과 결혼하겠다고 했다.
황제는 호한야가 가리킨 쪽을 보고 놀랐다. 천하절색의 궁녀가 사뿐히 절을 올리는 게 아닌가. 곱고 윤기 있는 머릿결은 광채를 발하고, 살짝 찡그린 두 눈썹엔 원망이 서린 듯했다. 너무나 아름다운 왕소군의 미모에 황제도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한 번 내린 결정을 다시 번복할 수 없게 된 황제는 땅을 치며 후회했다.
이윽고 연회가 끝난 후 황제는 급히 대전으로 돌아가서 궁녀들의 초상화를 하나하나 다시 대조해 보았다. 그런데 왕소군의 그림이 본래의 모습과는 다른데다 얼굴에 점까지 그려져 있었다. 그 순간 황제는 분노가 치밀어 궁중 화가 모연수에 대한 진상을 철저하게 조사토록 명령했다. 진상이 밝혀지고 모연수는 황제를 기만한 죄로 참수되고 말았다.
그 후 황제는 왕소군을 놓치기 싫어 그녀를 붙잡으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왕소군은 흉노족 복장으로 단장하고 미앙궁에서 황제에게 작별을 고하게 되었는데 황제는 매우 섭섭해했다.
왕소군은 고개를 돌려 마지막으로 장안을 한 번 바라본 다음, 서운한 가슴에 비파를 안고 말에 오른다. 왕소군 일행이 장안의 거리를 지나갈 때는 구경나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이렇게 왕소군은 번화한 장안을 떠나 늙은 흉노왕 호한야선우를 따라 황량한 흉노 땅으로 향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왕소군이 정든 고국산천을 떠나는 슬픈 마음을 달래기 위해 말 위에 앉은 채 비파로 이별의 곡을 연주하자, 그때 남쪽으로 날아가던 한 무리의 기러기가 아름다운 비파소리를 듣고 날갯짓하는 것도 잊고 있다가 그만 땅에 떨어졌다고 한다.
그러므로 왕소군을 일러 ‘낙안(落雁-기러기가 떨어지다)’이라고도 부르게 됐다. 그런데 왕소군이 떠날 때 중원은 따뜻한 봄이었지만 북쪽 변방은 차가운 바람이 불어 닥치고 있었다.
흉노 땅을 밟은 왕소군은 마음이 선량해 그곳 여인들에게 길쌈하는 방법 등을 가르쳤고 한(漢)나라와 우호적인 관계 유지에 힘써 그 후 80여 년 동안 흉노와 한나라와의 전쟁은 없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선우 호한야선우가 죽자 왕소군은 그의 아들에게 재가해 살다가 생을 마감하고 대흑하(大黑河) 남쪽 기슭에 묻혔는데 그 묘지는 지금도 내몽고 후허호트시(呼和浩特市) 남쪽 9km 지점에 있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해마다 가을철이 되면 북방의 초목이 모두 누렇게 시들어도 오직 왕소군 무덤의 풀만은 푸름을 잃지 않고 있어 그 무덤을 ‘청총(靑冢)’이라 불렀다고 한다.
왕소군의 이 슬픈 이야기는 흉노에게 억지로 시집을 가야하고 중국이 오랑캐들을 달래기 위한 화친정책 때문에 생긴 비극이라 할 수 있다. 지금도 중국인들은 왕소군을 민족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다. /서울포스트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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