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4대 명작 신해(新解) (3)-서유기

차이나소식통 2013. 3. 25. 17:46

4대 명작 신해(新解) (3)-서유기
2013.03.25 15:26 입력
▲서천에서 불경을 얻어 귀환한 삼장법사 일행을 환영하는 당태종

[시사중국] 문학은 인류 문명의 중요한 전달매체로 사람들이 아주 좋아하는 예술형식이다. 수천 년의 문명 세례를 거치며 풍부한 역사 풍모와 문화 정수를 간직한 중국 고전소설 중에서 가장 찬란하고 천고에 빛나는 작품을 꼽으라면 ‘수호전(水滸傳)’, ‘삼국연의(三國演義)’, ‘서유기(西遊記)’, ‘홍루몽(紅樓夢)’ 등 4대 명작을 꼽을 수 있다. 이들 작품은 인류문명을 풍부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인류 발전의 발자취를 기록했고 사람의 사상을 풍부하게 했으며 사람의 도덕과 지조를 육성했다.
 

(3) ‘서유기(西遊記)’-완전한 수련 이야기


‘서유기’는 남녀노소가 모두 좋아하는 뛰어난 문학작품이다. 그러나 세인들은 ‘서유기’를 즐겨 읽긴 하지만 그것이 함축한 것, 다시 말해 작가가 특별히 표현하려 하는 실질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서유기’가 세상에 나온 후 이 책을 단순한 낭만주의 신화소설로 여기며 그 요지를 언급하는 사람은 아주 적었다. 더구나 작가 오승은(吳承恩)이 일부러 숨기거나 감춘 것도 아니다. ‘서유기’가 표현하는 주제는 분명하고 똑똑하지만 사람들은 수련의 각도에서 깨닫지 못하고 단지 온갖 기괴한 요괴와 마귀들이 기묘하게 변신하는 세부적인 이야기만 감상하면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작가가 진정으로 표현하려는 의도가 무엇인지 생각하지 못했다.


소설 속 이야기는 삼장법사(당승 唐僧)이 서천(西天)으로 경서를 구하러 가는 과정이다. 사실 이는 애초부터 이 소설이 수련 이야기임을 알려 주는 것이다. 삼장법사가 경서를 구하기 전의 전생과 경험 역시 수련에 속한다. 손오공(孫悟空)이 펼치는 수많은 신통(神通)은 수련에 어느 정도 소질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헛소리가 아니다. 천기(天機)는 사람들에게 함부로 알려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승은은 아주 함축적인 방식을 사용해 표현했다. 손오공이 처음 삼장법사를 따를 때 죽인 여섯 강도의 이름이 안간희(眼看喜), 이청노(耳聽怒), 비후애(鼻嗅愛), 설상사(舌嘗思), 의견욕(意見欲), 신본우(身本憂)다. 또 이 이야기가 나오는 제목 역시 “마음 원숭이가 바로 잡히니 여섯 도적이 흔적 없이 사라지네(心猿歸正 六賊無蹤)”이다. 보다 명백하게 말하자면 여섯 도적이란 바로 승려들이 실천해야 할 ‘육근(六根)의 청정(淸淨)’이다. 그럼 육근이란 무엇인가? 바로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이다. 여기까지 도달하려면 오직 마음을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다.


사람의 수련은 상당히 고생스러운 것으로 금강부동(金剛不動)한 마음이 없으면 원만할 수 없다. 수많은 승려들이 온종일 앉아 가부좌하고 경을 외우는데, 다른 사람은 그의 마음의 승화를 전혀 느낄 수 없다. 그러나 그는 확실히 수련하고 있다. 그가 가부좌하고 경을 외우고 마음을 닦는 과정이 바로 자신을 바로잡고 ‘여섯 도적’을 씻어내는 것이다. 표현하자면 겉으로는 아주 간단한 법리지만 이 일보까지 도달하려면 끊임없이 수련에 대한 신념을 강화하고 자신의 ‘안, 이, 비, 설, 신, 의’에서 오는 방해를 제거해야 한다. 오승은이 세상 사람에게 알려준 방식은 바로 손오공이 여섯 강도를 때려죽인 것으로 구체화, 형상화시켰다. 오직 사람만이 우리 이 표면세계의 환상을 너무나도 중하게 본다. 본래 인류사회의 일체는 모두 환상이고 실질적인 것이 아닌데 오승은이 ‘서유기’ 창작에 있어 진실로 마음을 다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장법사가 경을 구하는 과정에서 구구 팔십일 난(難)을 거쳤다. 겉으로 볼 때는 이 난들은 이상야릇하고 변화무쌍하다. 그러나 사실 난마다 모두 고험이었고 난마다 모두 수련자의 마음을 겨냥한 것이다. 여인국을 지나가지 않으면 어떻게 색욕지심(色慾之心)을 버리겠는가? 여섯 개의 귀가 달린 원숭이가 없다면 어떻게 ‘진짜 자신(眞我)과 가짜 자신(假我)’을 분별할 수 있겠는가? 경을 구하는 과정에서 부딪힌 사람이나 요귀도 마찬가지로 어느 한 가지 일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모두 여래 부처님이 특별히 안배한 것이다. 바꾸어 말한다면 수련자가 의지가 확고하다면 넘지 못할 화염산(火焰山)은 없으며 반드시 원만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만약 주인공 넷을 한 수련인의 몇 가지 방면으로 본다면 작가의 의도를 더욱 쉽게 알 수 있다. 수련계, 특히 불교에서는 “마음 원숭이(心猿)를 가두고 의식의 말(意馬)을 거둔다”는 말이 있다. 소위 마음 원숭이와 의식이란 말을 굴복시킨다는 것인데 이는 자신의 경솔하고 불안한 마음을 조용히 하여 고요한 입정(入靜) 상태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마음은 또 가장 추측하기 힘들고 가장 복잡한 것으로서 그것은 한 사람의 일체를 전부 포함한다. 앞 문장에서 제기한 마음 원숭이가 바로 잡히니 여섯 도적이 흔적 없이 사라진다는 것은 바로 한 사람의 마음을 바로 잡은 후 육근이 자연히 청정해짐을 말한다. 그러므로 원숭이로 마음을 비유해 마음 원숭이라고 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주로 ‘공(空)’의 이론을 말하며 손오공의 ‘오공(悟空)’이란 이름을 ‘마음 원숭이’에게 사용하는 것은 아주 합당한 것이다. ‘마음 원숭이’를 가두면 자연히 의식이란 말(意馬) 굴복시킬 수 있다. 의마(意馬)란 바로 곧 삼장이 타고 다니던 ‘백룡마(白龍馬)’를 가리킨다.


다시 저팔계(豬八戒)를 보자. 사람이 수련의 문에 들어서면서 시종 준수해야 할 것이 바로 계율(戒律)이다. 왜 계율을 지켜야 하는가? 한편으로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남긴 “계율을 스승으로 삼으라”는 가르침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곧 수련자의 행위를 단속해 수련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 수련자에 대해 말하자면 가장 기본적인 요구다. 속인 사회의 일체는 모두 수련자를 단단히 붙들고 있다. 탐욕, 나태, 명리(名利), 질투, 각종각양의 사람마음의 집착은 모두 수련인의 다리를 끌어당긴다. 어떤 때는 아주 정진하지만 어떤 때는 돼지처럼 배불리 먹고 실컷 잠만 자면서 안일함을 추구 한다. 저팔계는 바로 수련자의 이런 방면을 형상화한 대표이다.


한 수련자로서 말한다면 정진하는가 여부는 종종 한 사람의 심성(心性)으로 가늠한다. 단, 동시에 한 사람의 일상 행동과 수련태도도 아주 중하게 보아야 하는데 일상생활의 모든 행동이 늘 깨끗하고 수련인다워야 한다. 그러므로 무거운 책임을 달게 감당하고 부지런히 아무런 원망도 없는 사오정(沙悟淨)이 표현한 것은 바로 수련인의 이 방면이다.


삼장법사는 겉으로는 아무 능력도 없지만 오직 하나의 반석 같이 확고한 마음이 있다. 견고하고 청성(淸醒)하며, 사악한 마(魔)의 교란에도 미혹되지 않는 진각(眞覺)의식야말로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이렇게 죽음을 무릅쓰며 후퇴하지 않는 확고한 신념은 필연적으로 수련자의 원만을 성취시킨다.


물론 책에서 표현한 것은 네 사람의 개성이 뚜렷한 수련자의 형상이다. 네 명의 사도(師徒)는 백마를 포함해 각자 자신의 과위를 성취한다.


끝으로 독자들이 쉽게 간과하기 쉬운 대목을 언급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삼장법사가 여래(如來)의 둘째제자인 금선자(金蟬子)가 환생했다는 대목이다. 불법(佛法)을 소홀히 대해 동토(東土)로 쫓겨나 환생했으나 간고한 수련을 거쳐 마지막에 정과(正果)를 이룬다. 이는 아주 큰 한 가지 문제를 설명하는데 바로 사람의 근원은 모두 간단하지 않은 것으로 마땅히 자신을 소중히 여겨야한다는 점이다. 또 한 가지 이치를 설명하고 있는데 사람으로 환생한 것은 아마 ‘천법(天法)’을 위반했거나 아니면 특수한 사명을 띠고 왔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인간 세상에 온 것은 곧 수련을 통해 되돌아가기 위한 것이다. 만약 수련을 잘하면 또 금선자와 같이 ‘정과를 성취’해 ‘전단공덕불(旃檀功德佛)’로 될 수 있다. 동시에 수련할 생각이 없는 그런 사람들에게는 불법(佛法)에 대해 절대로 경솔히 하거나 함부로 모욕하지 말라는 것을 알려준다. 이것은 ‘법을 비방하고 부처님을 비방’하는 큰 죄이기 때문이다!

 

‘서유기’ 중에서 가장 의미 있는 한마디는 “무릇 사람 몸은 얻기 어렵고, 중토(中土)에서 태어나기 쉽지 않으며, 정법은 만나기 힘들다. 이 세 가지를 구비한 사람은 이보다 더 큰 행운이 없다”는 말이다. (이 구절은 제 64회에 나온다.) 그런데 이 구절은 앞뒤 단락과 거의 아무런 관계도 없다. 작가가 삼장법사의 입을 빌려 이 한 마디를 한 것은 바로 이 책을 서술한 진심을 토로한 것으로 정말이지 작가의 고심한 배려가 아닐 수 없다.(계속)

 

글/ 탄진(撣塵-明慧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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