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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인국은 과연 존재했을까’

차이나소식통 2013. 3. 7. 20:03
 
소인국은 과연 존재했을까’
2013.03.07 20:00 입력
 
▲프란츠 박사가 멕시코에서 발견한 12cm의 성년 소인골격

[시사중국] 세계 각지 전설에는 보통 거인과 소인이 등장한다. ‘걸리버 여행기’ 중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걸리버가 소인국과 거인국을 여행하는 부분이다. 소인국에는 사람, 가축, 식물 등 일체 물체 크기가 현재 우리의 12분의 1밖에 안 된다. 그러나 거인국에서는 정반대로 모든 물체 크기가 우리의 12배가 된다. 지금은 이런 이야기는 허황한 이야기로 들린다. 하지만 소인에 대한 몇 가지 기록을 알게 되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현대에 발견된 소인들

 

1. 12cm의 성인 골격

 

독일 베를린 대학의 프란츠 박사는 멕시코 중부에서 동굴을 조사하던 중 기괴한 물건들을 발견했다. 그는 먼저 지면에서 기이한 도안을 발견했고 계속 그 밑으로 발굴을 시도했다. 이후 매우 작은 생활용품들을 발견했는데 보기에 장난감 같았다. 계속 파보니 이 생활용품의 주인으로 보이는 12cm의 소인 유해를 발견했다. 이 유해는 절대 어린이가 아니었는데 골격 형태가 성인이었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연구를 거쳐 이 유해가 약 5천년 전의 것임을 검증해냈다.

 

2. 1940년대 출현한 작은 흑인

 

중국 잡지 ‘구지세계(求知世界)’ 17호에 보도된 뤄구이성(羅桂生)의 ‘두 작은 흑인은 무슨 생물일까’라는 문장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우리집은 광시(廣西) 이강(漓江) 호반에 있었다. 40년대 중반 어느 날 정오, 태양이 매우 높이 비치고 있었다. 식사를 하는둥 마는둥 하고 있었는데 그 때 갑자기 집 뒤에 천을 말리던 나무의자 위에서 이 천에서 뛰쳐나오는 두 명의 ‘작은 흑인’을 봤다. 그들의 키는 대략 1촌(약 3cm)이었으며 사람과 인체 비례가 유사했다. 전신이 모두 검었고 옷은 입지 않았으며 직립보행을 했다. 그들은 나무 의자 중앙으로 가서 나를 보고 멈춰 섰다. 내가 젓가락을 들자 그들도 일제히 두 손을 들었다. 그 때 햇빛이 밝아 그들의 작은 손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나는 매우 두려워 돌멩이 하나를 들어 그들에게 던졌다. 그 후 즉시 집으로 뛰어 들어가 아버지에게 나와 보라고 했으나 그 소인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3. 2009년 발견된 초소형인간

 

▲카타르 도하에서 발견된 초소형 인간

 

2009년 4월, 인간의 모습을 닮은 작은 생명체가 카타르 도하에서 발견됐다. 이 생명체는 당시 지하주차장 한편에서 현장에 있던 여러 사람들에게 동시에 목격됐다.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겨 가까이 다가서자 이 초소형 인간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다만 당시 현장에 있던 한 여성이 휴대전화 카메라로 촬영해 증거자료로 남게 됐다.


소인에 대한 중국의 옛 기록들

 

소인에 대한 기록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두 존재하지만 중국 고대서적에는 특히 소인에 대한 기록이 매우 풍부하다. 대표적인 사례 몇 가지를 정리하여 소개해 본다.

 

1. 나무 구멍에 사는 소인들

 

다음은 청나라 시대의 선정(宣鼎)의 저서 ‘야우추등록(夜雨秋燈錄)에 기록된 나무 속 소인에 관한 글이다.

 

광동 오문도(澳門島)에 성이 구단(仇端)이라는 무역상이 있었는데 늘 각국에 가서 물건을 사고팔았다, 하루는 태풍을 만났는데 다행히도 어느 섬으로 대피했다. 바람이 약해진 후 뱃사공은 배를 수리하고 있었으므로 구단은 섬으로 올라가 산보를 했다. 보니 섬 중에 말라버린 나무가 매우 많고 큰 것은 열 아름 정도 됐다. 나무에는 구멍이 많이 나있는데 그 속에서 소인들이 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소인의 키는 7-8촌(25cm 정도) 되고 노인, 어린이, 남자, 여자가 있고 피부는 밤색이었는데 허리춤에는 모두 칼을 차고 있었고 활, 화살 등 물건 등 역시 매우 작았다. 소인들은 구단을 보더니 모두 ‘커치산이리!’하고 소리쳤다. 이 때 그는 변을 보려고 바지를 풀고 쪼그려 앉아 곰방대를 한 모금 빤 후 계속해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갑자기 시끄러워서 나무 위를 보니 나무꼭대기에 무릎 높이의 작은 성이 있었는데 모두 까만 돌로 쌓았고 성문은 열려있었다. 소인의 수는 천여 명이었고 모두 어깨를 맞대며 깃발을 흔들고 각 나무 구멍에서 호령소리에 맞춰 나왔다. 그 중 한 젊은이가 있었는데 얼굴 용모가 단정하고 머리를 묶어 맸으며 보라색 관을 쓰고 소인들을 총지휘했다. 그가 뭐라고 중얼거리는데 무슨 말인지 그는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그들은 ‘히리’하고 대답하더니 모두 모여 구단을 포위했다. 구단은 자기를 몰아내려는 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들이 작았으므로 두렵지 않았으며 아까처럼 계속 쪼그려 앉아 변을 보았다. 그 젊은이가 웅얼웅얼 무슨 말을 여러 번 했는데 구단이 대답이 없자 그들은 무기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활, 창, 칼 등등으로 공격했는데 양 넓적다리가 찔려 매우 아팠다. 구단이 싫어하며 장난식으로 담뱃대로 젊은이를 한대 쳤더니 넘어져 죽어버렸다. 군중들은 시체를 들고 성으로 들어가 성문을 견고히 닫고 남은 사람은 모두 구멍으로 숨었다. 구단은 배로 돌아왔다.

 

밤이 깊어 해안에 소인들이 몰려와서 진흙을 던지고 큰소리로 ‘러시슬이리’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새벽이 되자 조용해졌다. 구단은 소인을 한두 명을 고향으로 잡아가면 자랑거리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땔나무를 핑계 삼아 포대와 도끼를 들고 지난번 그곳으로 가서 나무 하나를 찍었다. 그 속에 소인은 매우 많았는데 아직 잠이 깨어나지 않은 한 가족을 포대 속에 넣었다. 배로 돌아와서 먹을 것을 주었는데 특히 잣을 잘 먹었다. 그가 돌아가려고 할 때 해안에 소인들이 개미처럼 몰려들었다. 입으로는 무슨 중얼중얼하는 것이 욕을 하는 것 같았으며 또한 작은 화살을 비오듯 쏘았다. 사공은 놀라서 밧줄을 풀고 출발했다.

 

한 달쯤 지나서 구단은 광동으로 돌아왔다. 아는 사람을 찾아다니며 난쟁이 나라 사람이고 소개했다. 이들은 고기를 먹고 단 것을 잘 먹었다. 다만 이들은 바다새가 물어갈까 두려워 혼자서 감히 다니지 않았다. 구단은 기뻐하며 소인을 수정 상자 속에 넣어 시장에 가서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이것으로 무척 많은 돈을 벌었다.

 

이후 다른 사람이 소인을 넘겨받았으며 그는 자단 나무로 작은 집을 지어주었다. 그 소인은 예의가 있었고 염치를 알았으며 머리가 좋고 생활습관이 현대인과 조금도 차이가 없었다. 단지 작을 뿐이었다.

 

▲중국 고서에 묘사한 소인국 사람들


2. 길이 10cm의 늑필국인

 

한나라 곽헌의 ‘별국동명기(別國洞冥記)’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늑필국(勒畢國) 사람은 길이가 세 촌(약 10cm)인데 날개가 있고 말도 잘하며 즐겁게 웃고 놀기 좋아한다. 그래서 이 나라를 선어국(善語國)이라고도 한다. 항상 무리로 날아와 햇볕을 쬔다. 그리고 몸이 더워지면 돌아간다. 단 이슬을 먹이로 하고 아침 일찍 나와서 이슬을 센다.”

 

곽헌이 기술하는 늑필국 사람은 문자가 비교적 적고 얼룩처럼 단순했다. 햇볕을 쬐다가 몸이 따뜻해지면 돌아간다. 이것은 요즈음 태양과 달을 향해 공법을 하는 일부 중국 기공사의 수행법과 비슷하다.

 

3. ‘열미초당필기’에 기록된 소인

 

청나라 건륭제 당시 예부상서 관직을 지낸 명망 높은 학자 기효람(紀曉嵐)이 있었다. 그의 저서 ‘열미초당필기(閱微草堂筆記)’ 가운데는 두 편의 소인국에 관한 기록이 있다. 이 책은 평생의 그의 견문을 모아놓은 것으로 당시 기효람은 학문과 문장이 천하에 떨쳐 대형 종합총서인 ‘사고전서(四庫全書)’를 편찬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그 기록은 믿을 만할 것이다.

 

그 중 한편 소인에 대한 기록은 그 책의 3권 ‘난양소하록 3권(灤陽消夏錄三)’에 있다. 책에는 현재 신장 우루무치에 있는 ‘금적화현(今迪化縣)’에서 본 내용에 다음과 같이 상세히 적고 있다.

 

몸 길이가 한 척(약 30cm) 밖에 안 되는 사람들을 늘 보았는데 남녀노소 다 있었다. 이 소인들은 석류나무 가지를 잘라 머리에 두르고 무리를 이뤄 가무를 했다. 그들의 목소리는 사슴소리 같이 가늘고 은은하고 부드러웠다.

 

어떤 소인은 조정의 주둔한 군대 장막에서 곡식을 훔쳐가기도 했다. 잡히면 땅에 무릎 꿇고 곡을 했다. 만약 그들을 줄로 묶으면 단식하여 죽었다. 만일 놓아주면 즉시 도망가지 않고 천천히 수 척을 걸어가서 뒤를 돌아보곤 했다. 사람이 쫒아가 욕을 하면 즉시 땅에 무릎 꿇고 울었다. 천천히 걷다가 멀리 가서 쫒아가지 못할 거리가 되면 신속히 산속 깊이 숨어버렸다.

 

청나라 군사들은 이 소인들의 거처를 결국 찾지 못했는데 그들을 어떻게 부르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들은 붉은 석류모자를 즐겨 썼기 때문에 편의상 ‘홍류왜(紅榴娃)’라고 불렀다. 당시 구현(丘縣-현재 하남성 휘현)의 승천금(丞天錦)이 목장을 순시하러 사람을 파견했는데 그가 한 소인을 붙잡아왔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들의 머리카락과 수염은 우리와 같았고 전설상의 괴물이나 요괴와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

 

▲‘산해경(山海經)’에서 묘사한 소인국


4. 서북해의 학민국

 

송나라 때 펴낸 ‘태평광기(太平廣記)’ 480권과 482권에서 일부 소인에 대한 논술이 있다.

 

서북해 술해나(戌亥那) 지방에는 학민국(鶴民國)이 있는데 그곳 사람의 몸 길이는 3촌(약 10cm)이고 걸어서 하루에 천리나 간다. 걸음걸이가 빨라 나는 것 같으나 오히려 바다학에게 잡아먹히곤 한다.

 

그들 중에도 역시 군자와 소인이 있다. 군자는 천성이 총명하며 지혜와 임기응변이 뛰어나서 항상 학 같은 것들의 재난을 방비하기 위해 나무를 깎아 자신 모양과 같이 만들어 놓는다. 어떤 때는 그 수량이 수백 개나 되며 그것들을 황량한 교외 물가에 놓아둔다. 학이 사람인 줄 알고 먹으러 내려오다가 나무에 부딪혀 죽는다. 이처럼 천 번도 넘게 당하자 이후에 학은 진짜 사람을 보고도 감히 먹지 못했다.

 

학민국 사람 대다수는 계곡 근처에 살고 끌로 구멍을 뚫어 성(城)이나 해자(垓字; 성둘레에 판 도랑)를 만든다. 30걸음 내지 50걸음이면 성 하나를 만든다. 이 같은 성이 천 개, 만 개가 넘는다. 봄과 여름에는 풀 씨앗을 먹고 가을과 겨울에는 풀뿌리를 먹는다. 여름이 되면 맨몸을 드러내 놓고 겨울이 되면 작은 풀로 옷을 만들어 입는다. 역시 양생의 법을 알고 있다.

 

학민국의 소인의 생활 모습은 중국의 오랜 고전인 ‘산해경(山海經)’에 묘사된 부분과 비슷한 점이 있다. ‘산해경’에서는 “소인국은 동방에 있는데 그 크기는 9촌이다. 바다학이 잡아먹으며 감히 혼자 다니지 않는다”라고 쓰여 있다. 학민국 사람들이 생각해 낸 목각인형을 보면 그들의 지혜는 현대인과 별로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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